
사주는 자연과학처럼 세상의 운행 원리를 탐구한다
사주는 타로 카드와는 달리 어떻게 해도 어떤 영과 소통하는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관련 글 바로 가기)
점술보다는 학문의 성격이 강하다. 이른바 명리학이다.
자연과학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운행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죄는 아니듯,
언뜻 생각하기에 명리학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오행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도 죄는 아닐 것 같다.
오행이란.. 어떤 상징적인 언어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이다.
사실 물리학의 원리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려지지 않은 물리학의 원리로 갈릴레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높은 곳에서 크기와 모양이 같은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동시에 떨어뜨리면 바닥에 동시에 떨어질 겁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피사의 사탑에서 실제로 떨어뜨려보니 진짜로 동시에 떨어진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한다.
“오옷! 예언자가 나타났다!”
사주의 여덟 자에 적힌 내용을 읽어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그것이다.
운명이 아닌 목적이 이끄는 삶
혹자는 명리학이 통계학이라고 하는데 트윈양 생각에 그것은 통계학이 아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들고 나오는 인생 지도의 분석이다.
기독교인들은 다 알 것이다. 각자가 타고난 소명이 있고, 자기 삶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사주의 여덟 글자를 놓고 인생을 대입해 보면
“이런 글자들이 있을 때 통계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삶 사니까, 당신도 이렇게 살 확률이 높습니다”가 아니라,
각각의 글자들이, 그리고 그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분명히 목적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다.
단지 그것은 자기 삶의 목적을 알았을 때 깨닫는 것이고, 목적을 모르면 글자도 그렇게 해석하지 못한다.
사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대략적인 기운의 흐름이다.
그래서 자기 삶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사주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된다.
실제로 삶도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사주가 가리키는 내용의 정교함에 몸을 떨게 된다.
사주 보는 것이 진짜 죄가 되는 이유
교회에서 사주 보는 행위를 금지하는 이유는, 사주의 예언적 기능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사주쟁이를 찾아가서 “흠 남편이 여자가 많군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런데 점쟁이한테 찾아가도 똑같은 말을 듣는다.
내담자는 사주쟁이 앞에서 흠칫 놀라며 속으로 ‘용하네’라고 생각하면서 “아이고 우리 남편이 글쎄, 주저리주저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사실상 사주 보는 행위와 점 보는 행위가 차이가 없다.
영이라는 실체가 없어도 영에 의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된다.
누군가 구름을 보면서 “음 오늘은 저기압이 강하니 상승한 공기가 팽창하며 온도가 낮아지고, 포함된 수증기가 응결하여 비가 내리겠군” 하면 죄가 아니다.
하지만 똑같은 구름을 보면서 “음 구름신이 저 모양으로 올라가시니 오늘은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시겠군” 하면 죄가 된다.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MBTI도 충분히 죄가 될 수 있다.
이는 마치 천주교의 제사와 같다.
천주교에서 제사를 허용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사를 ‘효를 표현하는 문화’로 받아들이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제사상 앞에서 “할아버지, 많이 드세요. 저 사업 좀 잘 되게 도와주시고…” 하고 있으면 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고전 8:7-10, 새번역)
운명을 점치는 도구가 아닌, 삶의 목적을 조명하는 거울로
사주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본다.
끝도 없는 절망의 터널을 지날 때 “이번 대운만 지나면 나아진다”라는 희망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성기가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또 얼마나 숙연해지는지.
하지만 인생이 어떻게 나아질지를 정하는 것은 자기 몫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왜 그 어둠의 터널을 마련하셨는지, 그 기간을 통해서 나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어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자.
지동설이 죄이던 시절도 있었다.
죄가 무엇이고, 어떤 마음을 죄라고 하는지, 교회에서 왜 그것을 금지하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기독교인으로서 사주를 보아도 되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